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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부대행사 #이동권 #20주년 #과거로 #돌아가지_않겠다

  • 게시일21-06-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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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셋째 날 부대행사

 #이동권 #20주년 #과거로 #돌아가지_않겠다

상영작 : 버스를 타자 장애인 이동권 보고서

사회 : 조은별(김포장애인야학)

패널 : 김도현(노들장애인궁리소), 박경석(박종필추모사업회), 문애린(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질문 1. 이동권 20주년의 소감과 버스를 타자를 보면서 느끼신 소감을 이야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김도현 : 영화에 간간이 나왔던 김도현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저 '버스를 타자' 다큐는 지난 20년간 4~50번은 봤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매번 볼 때마다 이게 느낌이 조금 다른 건 다 아시겠지만, 영화 속에 나오는 사람들이 계속 우리 옆에 있고 그러면서 나이 들어가는 모습, 그래서 영화 속에 나오는 모습과 차이 나는 모습들을 계속 보고 있죠. 사실 옆에 계시는, 박경석 님은 지금은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작년에는 노들야학 교장님이셨는데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전장연에서 활동하시는 이음센터 소장님, 보면 '저 때도 머리가 까맸네' 이런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2005년에 법률을 만들고 나서 이동권 관련해서 이렇게 법률을 만들었으니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이동권 투쟁을 하지 않고 다른 투쟁을 열심히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그때는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올해 20주년을 맞아서 다른 운동이 아닌 여전히 이동권 투쟁을 위해 버스를 잡아가는 게 어떻게 좀 우리가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봤던 것 같습니다.

 

- 박경석 : 저는 박경석입니다. 이 영상을 보고 느낀 것은요. 20년 전의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들을 확연하게 오늘 확인할 수 있었어요. 20년 전에 있었던 이 장애인권투쟁을 위해서 지금은 얼마나 변했는지 이것 하나였고 그리고 변하지 않고 여전히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런 소감이 하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여기에 영상 마지막에 보면 장애해방을 위해서 가신 두 열사분을 위해서 바친다고 마지막에 나왔거든요. 그래서 이동권 투쟁을 시작했을 때 그 두 분은 같이 투쟁을 했었어요. 그리고 이 영상이 발표되고 많이 알리면서 했을 때는 그 두 열사는 2002년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상을 보면서 이 글귀를 적은 박종필 감독은 또 이 자리에 없어요. 그래서 이 영상을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또 박종필 감독께, 그 당시에 2001년도에 오이도역을 계기로 해서 장애인권투쟁을 기록했던 하나하나의 카메라, 그 눈빛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는 게 너무 공허합니다. 2001년 투쟁을 통해서 2002년까지 1년의 투쟁의 과정을 일상 속에서 같이 하면서 그 카메라를 가지고 장애운동을 기록했던 다큐멘터리의 감독이거든요. 그래서 그가 없다는 것들이 많은 공허함으로 다가오기도 하고요.

이게 변화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정부가 이야기하는 태도,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의 관계 속에서 여전히 일어나는, 단계적으로 일반 버스 뭐 이런 여러 가지 용어들과 관계들은 지금도 참 변하지 않는 절벽 받은 장벽처럼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동권 투쟁이 단순히 이동권 문제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동권은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장애인운동에 중증장애인 역사에 전면적으로 섰다는 평가를 하고,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는 이 정도 소감입니다.

 

- 문애린 : 저는 이때 영상에 나왔을 때가 노들장애인야학 학생이었거든요. 그때는 어쨌든 소위 전문적으로 이야기하는, 이 현장에 굳이 나가기 싫었었는데, 지금은 현장에 나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고요. 오랜만에 보는 영상이라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때 영상에 나왔던 사람들이 머리도 까맣고 피부도 탱탱하고 젊었는데 지금은 보시다시피 머리도 하얘졌고요. 주름도 자글자글하고 몸도 많이 아파요.

 

- 조은별 :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나는 게 혜화역도 역사가 깊은 공간 중의 하나입니다. 서울시에서, 그러니까 서울시 인권현장에 현판을 다는 사업을 하고 있는데 혜화역에는 2개의 현판이 달려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서 계시고 들어오는 입구에 장애인 탈시설 권리선언현장이라는 게 달려있어서 마로니에 투쟁을 기념하는 게 있고요. 혜화역 2번 출구 앞에는 장애인이동권 현장이라고 붙어있으면서 또 애린동지 전에 이음센터 소장이었던 이규식 동지가 노들야학을 땡땡이치고 혜화역 리프트를 타고 가다가 떨어졌던 그런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기념하는 동판이 새겨졌습니다. 애린동지도 규식동지도 그렇고 다 투쟁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사람들인데 2021년 이 순간에는 중요한 투쟁에 부르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되었다는 게 이게 20년의 변화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 박경석 : 양적으로 따지면 20년의 변화니까 아예 안 늘어났다면 말이 안 됩니다. 이런 비교는 50, 60년도에 보릿고개가 있을 때 "너 아직도 굶고 있니?"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런 비교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수도권의 지하철에 그 당시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있는 역사, 우리는 1동선 1역사라고 이야기하는데요. 1동선 1은 하나의 역사에 그리고 승강장까지 엘리베이터로 다 이어가는 것을 1동선이라고 합니다.

보통 이 엘리베이터 설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1동선 1역사로 되어있던 게 서울 지역, 수도권 지역에 지하철 역사가 13% 정도 되었는데 지금은 91% 정도 됩니다. 2022년도 모두 1동선 1역사를 다 설치하자는 약속입니다. 아직 다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지하철 또다시, 아까도 보면 욕 많이 먹죠? 그런데 지금은 더 욕 많이 먹습니다. 욕도 발달해서 뭐 죽으라고 하면서 드러눕는 분들도 계시고. 이런 상황을 겪고 있고요. 저상버스 같은 경우에는 지금 영상에 보시면 한대도 없었는데, 저상버스 도입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2001, 2002년 투쟁을 통해서 또다시 법안투쟁을 시작하고 법안이 2005년에 제정됩니다. 2005년에 제정되고 2006년에 시행이 되어서 그래서 정부가 2007년도부터 편의 증진법을 발표합니다. 대한민국에 저상버스를 31.5%인가? 31.5%를 도입하겠다고 국가계획을 세웁니다. 이 국가계획은 그냥 세우는 게 아닌 주관부처 국토교통부에서 각 다 물어봅니다. 이거 누구 책임이냐 이러듯이 교통부가 책임이라고 했고 저상버스 도입한다고 하는데 혼자만 하는 게 아닌 각 부처에 다 협의를 거친 겁니다. 기획재정부와도 다 협의가 돼서 국무회의를 통과한 거예요. 대한민국 정부가 2011년도에 저상버스 도입을 31.5%라고 했는데 그랬는데 21년도가 3차 계획이 마감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5년마다 하는데 2021년도 저상버스 도입이 마감되는 해임에도 불구하고 1차년도 2011년까지 21% 한다는 거 못했습니다. 지금 24%입니다. 2007년에 자신들이 2011년까지 31.5%를 도입하겠다고 했는데 2021년도가 되어도 24% 정도밖에 못 한 겁니다.

어느 지역에 가면 진짜 5%도 안 됩니다. 서울은 그나마 문 대표님께서 "아아악! " 하니까 서울은 24년도까지 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 25년도죠? 계획이 그렇게, 앞으로 5년까지는 저상버스는 모두 서울에서 하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안 지켜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 계획을 보면 많이 변했다. 변하지만 여전히 정부는 똑같다는 것이고요. 그래서 지금은 이동권이 교통약자편의증진법안을 2가지로 올렸습니다.

 

- 문애린 : 보충설명을 드리자면, 아까 여기에 계시는 박경석 대표님이 이야기하셨는데 그러니까 지하철 같은 경우에는 21% 어쨌든 설치율이라고 하지만 정확하게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은 역사가 한 16개 정도 됩니다. 16개 정도 되는데 이 16개 중에서 4개 역사가 중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고 나머지 12개에는 내년까지 공사가 완료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상버스 같은 경우에는 서울 시내에 지금 일반 버스가 7천 대라고 한다면 저상버스가 약 4천 대로 웃도는 정도로 됩니다. 1/3 정도로 되는 그런 수치인데 원래는 서울시가 올해까지 60% 달성을 하고 내년까지 한 80%를 달성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면 한 5천 대 정도 가까이 내년까지는 확대가 되어야 하지만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미루고 있는데 박경석 대표님이 말씀하셨듯이 이 약속을 제대로 지키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열심히 투쟁해야겠지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질문 2. 김도현 동지는 비장애인이지만 <버스를 타자 - 장애인 이동권 보고서>의 주역이잖아요. 중요한 투쟁의 역할을 맡게 된 이유가 있나요?

- 김도현 : 뭐 인생사라는 게 다 우연과 어떤 계기가 엮여가면서 되는 것일 텐데, 사실은 제가 노들야학 교사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데 노들 야학을 시작한 게 20008월이었어요. 그런데 사실 그때 2000년 당시에는 한국사회에서 어떤, 이런 현장투쟁을 같이 좀 조직하고 끌어줄 만한 장애인조직이라는 게 사실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이어서 처음에 야학에 올 때는 저는 어떤 생각이었냐면 내가 어쨌든 이 옆에 계시는 이런 분들하고 지치지 않고 한 2~30년 활동하면 나중에 건강한 장애인조직을 하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굉장히 소박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2001년에 오이도역 사고 추락 참사가 터지면서 오이도역에서 운동이 시작되는데 그때만 해도 그 투쟁이 이렇게까지 폭발적인 중증장애인들의 조직과 투쟁으로 이어지리라고 아마 경석 님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왜 여기에서 잠깐잠깐 나오냐? 그것은 그 이유밖에 없습니다. 우리 투쟁조직이 없어서 오이도역에서 만들고 하는데 명확한 지도부도 집행부도 없는 거예요. 노들장애인야학이 명확히 운동조직도 아닌데 이 단체를 맡았던 거예요. 그리고 저는 노들야학의 유일한 1명이었어요. 좋아서 열심히 한 게 아니고 그때 우리나라 장애운동상황이 열악했고 하다 보니 이동권 투쟁에 일종의 실무책임을 맡고, 실무책임을 맡은 거에 실무자가 1명이니까 사실은 이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은 제가 아까 영화를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사실 영화를 보면 저도 지금도 조금 울컥하는 장면이 하나가 있어요. 그게 뭐냐면 여러분, 우리, 그러니까 서울에서 농성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사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2007년에 만들 때 사람들이 농성장을, 12시간을 했었잖아요? 이 다큐에서 날짜를 보셨을지 모르겠는데 2차 버스타기를 해서 광화문에서 시청으로 가서 그날이 723일입니다. 2001723일로 제가 기억하는데요. 결국에 농성장을 차린 날이 730일입니다. 그러니까 농성장 하나 차리기 위해서 시청 앞에서 정말 일주일을 농성하고 천막을 한 5개 정도 저희가 뺏기고 나서 겨우겨우 농성장을 차리는데 마지막 일주일을 버티다가 다 막 달려가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리고 마지막에 달려오고 경석이 형 혼자 남아서 줄 걸고 막 이러고 있었을 때 저는 그때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 이유가 그때 유일한 실무자인데 집행위원장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저를 위해서 그렇게 한 게 아니고 내가 가면 실무가 비니까.

그리고 버스 점거 사진이 나오는데 그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다 같이 하고 점거를 다 하고 경찰이 치고 들어올 때쯤이 되면 저는 빠져있고. 그러니까 그때 사실 고통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냥 가서 싸우자면 속이라도 편한데 그러지 못하고 조금 떨어져서 계속 바라보고 있어야 했던 그 지점이 있어서 저를 보면, 많이 봤는데 울컥울컥해요. 그런 기억이 조금 있고요.

저 때는 농성장 지키는 게 어려웠어요. 40일을 하면 제가 30일을 했으니까 유지한다는 게 힘들었죠. 그런데 광화문 농성을 5년을 했을 때 그걸 지켜내는 걸 보면서 밖에서 변한 것도 아닌 것도 있지만 우리 안에서는 '이게 우리 변한 모습이 있을까 '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엄청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년의 농성을 전국에 있는 많은 동지와 함께 어떤 조직된 힘으로 지켜낼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운동이 예전보다는 많이 성장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 한켠에 좋은 것도 있고 그런 것 같습니다.

 

 

질문 3. 박경석 대표님은 원래도 투쟁을 좋아하셨나요?

- 박경석 : 저는 노들야학에 있었어요. 노들야학을 통해서 했었고 영상에 나오는 모든 사람의 대다수가 우리 노들야학 학생이었고요. 이때 한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썼더라고요.

사회 전체를 이동시키지 않고서는 학교조차 갈 수 없다는 것. 사회 전체를 새로 배우게 하지 않고서는 노들야학에서의 작은 배움도 불가능하다는 것.”

이 글을 보았습니다. 그 당시에 노들야학에는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어요. 아차산역에서 회관으로 올라오는데 거기에 있었거든요. 거기 올라가는 것도 힘들고 지하철 타고 가는 것도 그렇고 장애인 콜택시도 없고 특별교통수단도 없고 버스도 이동되지 않았던. 그때 그 지역에서 장애인들이 공부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어요. 하나가 생겼는데 12시간을 운행하면서 학생들을 등하교시키는데 그런 고민이 들었어요. 야학이 같이 공부를 열심히 하기 위해서 1~2대를 더 늘리는 게 나을지, 아니면 지하철 버스를 만드는 게 장기적으로 우리에게 좋을지 이런 고민 속에서 노들야학에서 함께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따지면 조직을 늘려서 학교 운행을 좋게 하는 방식도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만 우리 선택들은 당당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질문 4. (박경석) 투쟁에 참여했던 분들이 객석에 계시는데 그분들께 제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때 참여했었던 느낌과 투쟁에 했을 때 소감을 말해주세요.

- 관객 1: 사실 장애인들도 인간이고 뭔가 우리가 이 삶에서 내가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고 사실은 저는 장애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대학에 와서 알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이거는 나도 충분히 참여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했던 것 같고요. ,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 관객 2: 저는 아까 버스 점거하던 2001829일 버스 점거하던 투쟁이 있었는데요. 저는 2001829일 목요일 저녁 749분에 노들야학에 처음 왔어요. 전화를 거니까 김도현 선생님이 전화를 받으셔서 야학을 알려주셨고 노들야학에 가니까 이분이 학교에 다니고 계셨고요. 노들야학 소개를 듣고 나서 노들야학은 학교에 다니지 못한 장애인분들이 다니는 것이라는 소개를 듣고 알겠다고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그 교사분이 저한테 며칠 뒤에 집회가 있어서 나오라고 해서 저는 너무 충격받은 거예요. 장애인이 데모한다고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왔던 것이어서.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저는 그날 집회를 가지 않았어요, 며칠 뒤에. 이 학교가 되게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집회 갈까 말까 전혀 고민하지 않았고 이 야학을 갈지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계속 고민했었고요. 며칠 뒤에 영상을 보고 또 한 번 너무 충격을 받아서 '정말 여기는 이상한 곳이 맞네. 여기에 가면 인생이 다이나믹하게 꼬일 것 같네' 그런데 한 번 더 가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서 갔습니다. 갔더니 이분이 계셨어요!

영상에서 봤던 이분이 현실에서 계셔서 제가 영상 잘 봤다고, 투쟁하시는 거 봤다고 인사를 드리니까 교장 선생님이 저한테 인사를 하셨어요. 저는 이분이 교장인지 몰랐거든요. 그래서 노들야학 교장 박경석이라고 해서 제가 또 충격을 받았어요.

저는 장애인 야학이 좋은 일을 하는 곳이고 이 대표는 당연히 비장애인일 것이라고 제 머릿속에 있었던 것 같고. 그런데 이분이 불법시위를 주도하시는 분이 이 학교의 대표고 이 학교 대표는 장애인이고, 제가 가지고 있던 이 모든 편견과 고정관념이 와장창 깨지는 경험? 그런 것을 하면서 노들야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인생을 바꾸는 경험? 축복 같은 경험이었습니다.